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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카게프로

[쿠로신] CRISPAPPLES 4.














  꾹 감긴 눈꺼풀 사이로 은은한 빛이 새어들었다. 아침? 새벽? 알 수 없다. 신타로는 게슴츠레 눈을 뜨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려대니 곧 시야 안으로 깜빡거리는 디지털 시계가 들어온다. 새벽 세 시, 이럴 수가. 한 시간 만에 이렇게 눈을 뜨게 되다니. 아, 완전히 망했다. 속으로 탄식하던 신타로는 곧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잘도 잔다. 그렇게 괴롭혀놓고. 저의 옆에 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쿠로하를 보니 괜스레 속이 근질거리며 열이 찼다.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지 못하고 곤히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며 꿀꺽, 꿀꺽, 심키기를 반복하던 신타로는 곧 말 대신 숨을 뱉어내며 턱을 괴곤 쿠로하를 바라보았다. 예쁘네. 스윽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은 단지 그것뿐으로, 신타로는 반대쪽의 손을 뻗어 밤하늘이 내린 양, 아직도 물기에 젖어 반들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살살 쓸어내렸다. 아직 물기가 다 가시지 않은 것을 보면 씻고 나와 바로 자기 시작한 모양이지. 잠에서 덜 깨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어떻게든 돌려가며 서서히 손을 내린 신타로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암전되어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다시 잠에 빠질 시간이다, 그리 생각한 신타로의 눈 앞으로 대략 한 시간 전의 상황이 종이에 물감을 떨어뜨린 양, 서서히 번져 흐릿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저의 손에 뺨을 맞은 청년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었다.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담아낸 채, 저를 내려다보는 것이 이제는 면상 중앙에 주먹을 꽂아넣고 싶을 정도로 증오스러운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 이제 좀 쉬게 해주시죠. 지치거든요? 도대체 언제까지 괴롭히려는 심산일까. 혹 진심으로 불편함을 표현하면 아주 잠깐이나마 자제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든 그를 떨쳐낼 생각을 하며 신타로는 침을 꿀꺽 삼킨 후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얼굴을 잡히지 않은 오른손으로 밀어냈다. 허나 신타로의 진심 어린 짜증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전에 얼굴을 맞았으니, 이쪽에 대한 보상은 톡톡히 받아야겠는데. 라며 웃을 뿐. 떨어지려는 기미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 젠장. 극에 치달은 짜증이 기어오른다. ‥가능하려나. 중얼거리자 뭐라고?'라며 물어온다. 좀 꺼지라고요. 일절 생각도 하지 않고, 쿠로하의 가슴팍을 강하게 밀친 신타로는 벌떡 일어나 침대로 달려가 누웠다. 아, 씨! 방심하고 있던 탓인가, 그대로 소파 옆으로 굴러떨어진 쿠로하가 작게 욕을 지껄이며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간 신타로를 노려보았다. 아, 젠장. 놓쳤잖아. 저의 귀에 모두 들어온다는 것은 알고 있을런지. 잠시 그대로 앉아 신타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쿠로하는 허. 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고 있어라, 꼬맹아. 씻고 올 테니까. 몸을 삼켜버린 이불의 건너편으로 들리던 목소리가 끊기고, 발소리가 서서히 사라져 간다. 잠시 해방감을 느끼며 신타로는 침대의 구석으로 파고들어 이불에 고개를 푹 파묻었다. 부들부들한 이불의 감촉이 살결에 닿자 불쾌했던 기분은 가볍게 날아간다. 발끝에서부터 밀려오는 온기에 이내 꾸벅꾸벅 눈을 깜빡이며 졸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아마 이후, 저의 옆으로 다가와 누워 잠을 자기 시작한 모양이지. 모든 회상을 마친 신타로는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안녕히 가세요. 다시는 보지 말죠." 

차 문을 열고 내리며 녀석이 내뱉은 말이라는 것은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네 녀석이 아무리 그래도 내일이면 만나게 되어 있어. 뚱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신타로를 향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그는 아주 입술을 비쭉거린다. 아, 예. 그러십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지만, 그 속에 긍정적인 감정이라고는 일말도 보이지 않는다. 쿠로하는 오냐. 고개를 끄덕거렸다. 곧 무언가 이야기하기 위해서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야속하게도 문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성격 급하긴. 창문 밖으로 보이는 신타로를 가만히 바라보던 쿠로하는 천천히 시동을 걸었다. 창문을 내리고, 신타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쿠로하는 씩 미소 지었다. 내일 보자. 


  시간은 참 빠르다. 밀린 서류 더미의 사이에서 쿠로하는 그것을 새삼 느끼고 있었다. 벌써 몇 달인가, 그 날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그것을 계산하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날 이후, 내일 보자는 말이 무색하게 쿠로하는 신타로를 제대로 만날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유를 굳이 따져 묻자면 다음 날의 이른 아침, 막 출근한 쿠로하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상당수의 서류 더미를 책상 위로 던져놓고 부리나케 도망가버린 타테야마 켄지로의 공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 망할. 잘근 입술을 씹어대며 작게 욕을 지껄인 그는 좀 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아, 젠장, 뭐 좋은 구실 없으려나. 그것도 잠시 슬슬 질린 듯 들고 있던 펜을 거칠게 놓은 청년은 몸을 살짝 젖혀 의자의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았다. 좀 더 편안하게 앉기 위하여 다리를 쭉 펴니 가죽 재질의 매끄러움으로 인해서 주르륵 몸이 미끄러진다. 아, 저가 앉아있는 이곳이 집에 놓여진 폭신한 소파 위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쿠로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마치 닫혀가는 극장의 무대처럼 어둠이 내려와 시야를 가린다. 여유로운 저의 모습만큼 머리도 느긋하게 돌아가 주면 좋으련만, 간절히 바랐지만, 그의 머리는 퉁명스런 소년의 얼굴을 떠올리며 구실을 찾기 위해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허나 흘러내린 다리가 슬슬 땅에 닿을 무렵, 총알에 맞은 양 머리를 뚫고 지나가는 생각 하나에 쿠로하는 눈을 뜨고 벌떡 몸을 일으켜 캘린더를 찾았다. 삼 일, 사 일, 오 일, 천천히 날짜를 세어나가던 그의 손가락이 어느 부분에서 딱 멈추어 더는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중간고사 시즌. 붉은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쿠로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곡선을 그렸다. 음흉하다, 손색없는 표현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이 아쉬움을 느끼는 쿠로하와 다르게 신타로는 솔직히 말하자면, 하루하루가 행복했다. 그 날 이후 저를 부르는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좆같은 장난을 치는 날도 없다.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종례시간에도 들어오지 않았다.─뿐만 아니라 수업시간에도 간단히 요점만을 설명하고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다.─이 처럼 행복한 날이 또 있으랴. 2년간 꾸준히 시달려 왔던 그 모든 시련의 대한 보상을 드디어 받는구나! 그리 생각을 하니 절로 흥겨워진다. 

  "신타로, 좋은 일이 있는 거지?" 

  신타로는 저를 향한 물음에 샐러드를 휘적거리던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시작된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저의 손바닥의 대략 두 배 정도 되어 보이는 커다란 빵을 든 채 크림을 여기저기 묻힌 소년이 배시시 웃으며 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 커다란 눈동자와 왼쪽 눈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눈물점, 하얀 피부,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팔이 특징인 소년의 이름은 코코노세 하루카였다. 신타로는 대충 뭐, 이것저것요. 하고 답하며 턱을 괴고 하루카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그렇구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축하해! 대강의 답변이었음에도, 그는 짝 박수를 치며 제게 그리 말했다.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코코노세 하루카와 코코노세 쿠로하. 신타로는 머릿속에 아른아른 그려지는 얼굴을 애써 지워내며 푹, 한숨을 쉬었다. 그 한숨까지는 미처 잡아내지 못한 듯, 동그란 눈을 끔뻑이던 하루카는 아, 신타로도 먹어볼래? 이 빵 맛있어~ 라며 행복한 얼굴을 한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 보기 좋게 웃는 그 모습에 신타로는 픽 웃으며 입을 벌렸다. 아, 먹어볼래요. 

  부디 이대로만 가라. 훗날 다가올 미래는 예측조차 하지 못한 채, 그는 단지 이 순간을 즐기자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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