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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카게프로

[쿠로신] CRISPAPPLES 5.














[BGM] 루시아 - 오스카 

마지막







 시간은 정말로 순식간에 흐른다. 쿠로하는 그것을 새삼, 다시 느끼며 시험지와 답안지 카드가 들어있는 서류봉투를 한 손에 들고 유유히 걸어 2-7이라고 팻말이 붙어있는 교실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교실은 평소와 달리 조용했다. 그가 교실에 들어가자 각자의 자리에 앉아 책 하나씩을 들고 달달달 무언가를 외우고 있던 아이들은 야, 선생님 오셨다. 라며 바삐 움직였다. 보고 있던 책을 정리하여 사물함에 넣은 그들은 빠르게 자리에 앉았다. 쿠로하는 천천히,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하여 교실을 쭉 둘러보았다. 키사라기 신타로. 키사라기 신타로. 그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며 주위를 둘러보던 쿠로하는 창가 바로 옆 뒤에서 두 번 자리에 앉은 신타로를 발견하고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집중해라. 쿠로하는 신타로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안에 자리하고 있던 20여 명의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저 자신에게 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시선의 주인 중에는, 당연하게도 신타로가 있다. 그는 서류봉투를 열어 시험지를 꺼내 교탁 위에 올려두었다. 곧, 교실 앞, 칠판 위에 자리하고 있던 스피커에서 시험이 시작됨을 알리는, 꽹과리부터 시작하여 온갖 전통 악기는 모아놓은 것 같은 시끄러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쿠로하는 꺼낸 시험지를 돌리고, 마지막으로 답안지 카드까지 한 장씩 나누어 주었다. 열심히 풀어, 평균 낮으면 알지? 쿠로하의 말에 학생들의 입에서 일제히 쿠로하 쌤 치사해요~ 라는 야유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닥치고 풀자. 순식간에 조용해진 교실을 둘러보며 쿠로하가 방글 웃었다. 그는 여전히 교탁 앞에 선 채, 계속해서 어느 한 부분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시험을 치는 키사라기 신타로. 그의 모습은 여느 학생들과는 달랐다. 펜을 굴리기도 하고, 머리를 짚기도 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가 들기도 하고, 자신의 답을 몇 번이고 확인하며 똑같은 문제를 서너 번 풀어보는 여느 학생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그는, 자신의 지식에 확신이 있었다. 한 번 본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는 소년, 어릴 적부터 IQ 168의 비상한 머리로 일류대를 졸업한 학생들마저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그 많은 과목을 우수한 성적으로 끝냈다던. 그 어린 나이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알아버렸기 때문인가, 감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소년은 언제나 냉랭했으며, 날카롭다. 언젠가 선생을 꿈꾸던 제가 소년에게 관심을 가졌을 때 누군가가 해주었던 말이렷다. 어느 누가 했던 말인지 더는 기억나지 않았다. 더불어 기억할 필요도 없었다. 쿠로하는 코웃음을 쳤다. 나는 저 글러 먹은 새끼가 어떤 놈인지 알아. 냉랭은 개뿔이. 어떻게 보아도 그저 애새끼다. 다른 녀석들과 다를 것이 없는. 그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정말로 멍청한 짓이지. 근본 없는 자신감이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지배한다. 그는 확신했다, 키사라기 신타로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다. 

  

 "이제 걷을 테니까 펜 내려놔. 맨 뒤에 있는 놈들, 걷어와라. 앞번호가 앞으로 오게." 

  50분 다 됐네.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시작종을 두 키 정도 높인 것만 같은 시끄러운 종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교실 안을 울린다. 쿠로하는 비딱한 자세로 교탁의 옆에 서서 교실의 맨 뒷줄을 가리키곤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아이들은 빠르게 일어나 답안지 카드를 거두어 차례대로 쿠로하에게 내민다. 그는 그것을 받아 번호 순서대로 짜 맞춘 후, 천천히 넘기어 문제가 없나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거렸다. 쿠로하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그제야 휴우, 한숨을 내쉬던 아이들은 종례요, 쌤, 종례! 라며 보채기 시작한다. 그는 이것 먼저 두고 옵니다. 핸드폰도 가져와야 하는데, 받아가기 싫으냐?'라며 슬쩍 비웃음을 흘리고 답안지 카드를 갈색의 서류봉투 안에 넣어 밖으로 향했다. 교실의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마자 싸한 바람이 코트 속으로 숨어들어 온기를 녹인다. 날씨 춥네. 투덜거리는 어투와는 다르게, 그는 웃고 있었다. 


 "시, 신타로!" 

  신타로는 오늘도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창가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온몸에서 열이 날 정도로 뜨거운 바람이 새어 나오는 히터 옆의 자리에서 신타로는 책상에 고개를 처박은 채 오늘도 여유롭게 낮잠을 잘 생각이었다. 그래, 낮잠을 잘 생각이었지. 신타로는 저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뒷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붉은 머플러를 목에 칭칭 두른 갈색 머리의 소녀 한 명이 숨을 헐떡이며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너. 왜 그렇게 잔뜩 당황해서 달려온 거야? 신타로의 물음에 아야노는 헤헤, 미안‥‥. 하고 괜스레 사과하며 저에게 다가온다. 딱히 미안할 건 없는데. 소녀를 바라보며 중얼거린 신타로가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본다. 이렇게 저를 찾는 것을 보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신타로는 눈을 느릿하게 끔뻑거리며 아야노의 입에서 얼른 저를 찾은 이유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이유일까, 눈과 머리, 그리고 귀. 모든 것을 동원하여 유추해본다. 공부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 나를 찾은 이유일까? 신타로의 머릿속에 한 가지의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니다. 중간고사는 이미 끝났다.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시험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제 따위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 뭐야, 아주 잠시 성적이라는 단어가 저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어차피 평소처럼 고작해야 30점, 20점, 10점, 그래. 다를 것 없는 점수를 받았을 것이 뻔했다. 인제 와서 새삼스럽게 성적이 안 좋아!'라고 이야기할 리는 없지. 애초에 성적 같은 거, 조금 위험해~ 라고 느낄 뿐이지, 신경도 안 쓰잖아. 이 녀석. 신타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도대체 왜 찾아온 거야? 신타로의 물음에 아야노는 아, 아아!'하고 소리를 내다 보충수업 벽보가 붙었는데‥‥. 라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 보였다. 

  보충수업 벽보? 아야노의 말에 신타로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보충수업 벽보가 붙는 것은 그리 희귀한 일이 아닐 터인데. 신타로는 감을 잡았다는 듯 다소 모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내뱉었다. 

 "너, 그거지? 나 이번에도 보충이야~ 라고." 

 "신타로 국어 보충 나오라고 적혀있어!" 

 "뭐?"  

  신타로는 저의 귀를 의심했다. 동시에 말해버려 무언가를 잘못 들은 것일까, 그는 인상을 팍 찌푸린 채 물었다. 국어 보충 나오라고 적혀있었다고? 신타로의 물음에 아야노는 어? 응! 맞아, 신타로 보충수업‥‥. 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허? 말도 안 된다. 보나 마나 이번에도 백 점일 텐데. 보충이라는 것은 본래 저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무슨 일이지? 답안지 카드 오류? 신타로가 인상을 팍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아주 잠깐, 저가 일어나 걸음을 옮겼을 때 뒤에서 자, 잠깐만, 신타로! 하는 힘 없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신타로는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뒷문을 열고 복도로 나와 벽보가 붙어있는 게시판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영문모를 일은 이미 이곳저곳에 퍼뜨려진 듯싶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아이들이 일제히 저를 쳐다보며 소곤거리는 것을 보니 그 바보 녀석이 잘못 봤을 리는 결코 없다. 그는 게시판 앞에 서서, 천천히 벽보를 바라보았다. 영어 보충자, 수학 보충자, 역사 보충자‥‥. 성적이 좋지 않은 녀석들의 이름이 주르륵 적혀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오자 신타로는 허, 숨을 터뜨렸다. 이 명단 안에 저가 섞여 있다고? 천천히 눈을 흘겨 벽보를 읽던 그는 마지막 붙어져 있던 얇은 종이에 적혀진 이름을 보고 그대로 벽보를 게시판에서 뜯어냈다. 국어 보충자, 키사라기 신타로. 다른 벽보와 다르게 그 종이에는 저의 이름만이 적혀져 있었다. 

  국어 담당, 코코노세 쿠로하. 신타로는 숨을 뱉어냈다. 이 미친 새끼가. 속에서부터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른다. 씨이발. 신타로는 몸을 돌려 그대로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계속해서 걷고 있으니 건너편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하루카 선배와 타카네. 신타로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하루카와 타카네의 앞에 섰다. 선배, 쿠로하 새끼 어디 있어요. 신타로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하루카는 적잖게 당황한 듯 손가락을 꼼지락대다가 어? 어, 아까 저기 교무실에서 봤는데‥‥. 라며 교무실 안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뒤졌어. 감사합니다, 신타로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쟤 왜 저렇게 화났어? 그, 글쎄?'하는 타카네와 하루카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교무실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교무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눈동자를 두룩두룩 굴리며 쿠로하를 찾았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새끼를 발견한 그는 인기척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그의 책상 옆에 섰다. 

 "야." 

  신타로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하다. 쿠로하는 저를 찾아온 신타로를 흘끗 바라보다가 히죽 웃음을 흘리며 의자를 돌려 신타로를 바라보았다. 아아, 무슨 일이야. 신타로. 저의 이름을 부르며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꼴이 빡친다. 신타로는 쿠로하의 멱살을 꽉 잡아당겼다. 그와 동시에 쿠로하는 손을 뻗어 마찬가지로 신타로의 멱살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겨우 그 정도 힘으로 뭘 어쩌겠다고 이러시나. 그것보다 오랜만에 봤는데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공손히 인사는 못 할망정 이런 식으로 대하면 안 되지. 어른인데. 그리 저의 귀에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근질거려 신타로는 참을 수가 없었다. 신타로는 아, 씨발. 씨발. 욕을 지껄이며 쿠로하의 어깨를 잡고 힘을 실어 밀었다. 떨어져. 싫은데? 신타로의 요구는 간단히 무시당하고, 쿠로하는 천천히 신타로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 그의 허리에 두른다. 신타로는 징그러움에 몸서리를 쳤다. 잠깐, 하지 마. 이번 요구도 당연하게 짓밟힌다. 뒷목에 붙어있던 손바닥 또한 움직이기 시작하며 와이셔츠의 위로 길고 얇은 손가락이 움직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이 저의 척추를 아주 천천히 쓸어나간다. 불쾌한 간지러움에 신타로는 잠깐, 잠깐, 잠깐. 잠깐이라는 말만을 수십 번 반복한다. 동시에 신타로의 머릿속에 붉은색의 사이렌이 번뜩거렸다. 잠깐, 쿠로하. 선생님. 신타로는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잘근거리며 아, 젠장. 욕을 지껄인다. 저의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허리에 닿자 그는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숙였다. 잠깐의 정적, 죽고 싶다. 좆같은 새끼. 미친 듯이 속으로 제발 꺼져요. 내 인생에서.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지, 원망 서린 목소리가 저의 귀에 확실히 꽂혀온다. 뭐가 그리 두려운 건지, 이야기라도 들어볼까 하는데, 어때. 제발 꺼져. 더는 반항할 힘도 없다는 듯, 신타로는 한동안 축 늘어져 그에게 안겨있다가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이거 놔. 싫은데? 선생님들 와요. 그럼 여기서 대놓고 밝히고 난 잘리고. 괜찮지? 제발 좆 까,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요. 

  시시한 놈. 흐르는 정적 속에서 쿠로하는 신타로와 얼굴을 마주했다. 신타로의 앙다문 입술이 눈에 들어오자, 쿠로하는 고개를 들이밀었다. 잠깐, 뭘 하려는‥‥. 그는 묻는다. 쿠로하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답도. 신타로와 쿠로하의 얼굴은 점차 가까워진다. 신타로의 코끝에 쿠로하의 코끝이 닿아온다. 떨리는 눈으로 바라본 그의 입술은 저의 입술을 잡아 삼킬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약간 벌려져 있었다. 저기, 선생‥‥. 신타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쿠로하는 천천히 신타로의 입에 저의 입술을 맞춘다. 벌어져 있던 신타로의 입술 사이로 천천히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다. 마음의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빼앗기는 산소는 고통을 초래했다. 이대로면 죽어버릴지도 몰라, 머리가 텅 비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마당에, 신타로는 그저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하며 입술을 벙끗거렸다. 허나 그것은 되려 역효과를 내어 오히려 쿠로하의 움직임에 맞추어 키스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천천히 온몸에 열이 오름과 동시에 담아두었던 모든 산소가 빠져나가자 현기증이 난다. 눈앞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며 당장에라도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처럼 힘이 풀린다. 

  쿠로하는 신타로의 꾹 감은 눈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조금만을 노래하며 제자의 입술을 탐하는 꼴이라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혐오감이 물밀듯 치밀어 오른다. 그는 점차 달뜬 숨을 뱉어내는 신타로의 아랫입술을 문치로 살짝 깨문 후, 천천히 고개를 떼어냈다. 어느새 눈을 뜨고 멍한 눈길로 저를 바라보는 신타로의 입술 밑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낸 후, 허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치우고는 숨 쉬어. 살짝 속닥거린다. 신타로는 꿀꺽 침을 삼키고 눈을 감았다. 쿠로하의 말에 따라 몇 번이고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안정을 찾았다. ‥‥씨발새끼. 곧 슬며시 눈을 뜨고 경멸하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던 소년은 그리 말하며 몸을 돌려 교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신타로는 교무실 밖으로 뛰쳐나와 미친 듯이 달렸다. 정말로 미친 듯이. 거칠게 숨을 내쉬며 금방이라도 힘이 풀려 쓰러질 것만 같음에도 불구하고 미친 듯이 달려 계단을 오른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정신없이 뛰어 올라간 그는 옥상으로 향하는 문 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교무실로 향하던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다시 한 번 선명히 머릿속에 떠오른다. 저 녀석, 이번에 점수가. 뭐야, 천재라며? 이제까지 꼼수라도 썼던 모양이지. 아니면 운이 좋았거나. 보지 못했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지 못하면서. 의외로, 사람의 눈을 자주 신경 쓰는 구석이 있지, 신타로는. 언젠가, 누군가가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아아, ‥‥그 말이 맞아.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있다. 신타로는 천천히 옥상의 문을 열었다. 수업은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다. 종례도 끝난 후에, 그 녀석이 없는 때에. 신타로는 문이 있는 바로 옆자리에 앉아 벽에 고개를 기댔다. 겨울바람이 분다. 싸늘한 겨울바람. 이대로 얼어 죽는 것도 분명 나쁘지 않겠지, 그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신타로는 마지막 교시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감기라도 걸리지 않으면 다행이련만, 완전히 차가운 얼음장처럼 식어버린 몸을 손으로 슥슥 비비며 옥상에서 나온 신타로는 아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래도 시간표를 착각한 모양이었다, 학생들이 나가는 모습이 보여야 정상이거늘,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양 조용한 학교를 보니. 저가 옥상으로 뛰쳐 올라간 직후 끝나 하교한 모양이지. 지금이라면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잘 된 일이지. 신타로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해 질 녘이다. 창문 너머로 일렁이는 노을빛에 홀린 듯, 걸음을 멈추고 창밖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예쁘네. 녀석처럼. 꼴에 맞지 않게 감상에 젖은 모양이었다. 신타로는 두어번 고개를 까딱거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니 2-7이라고 적혀진 팻말이 보인다. 그는 뒷문을 열고 교실 안으로 들어가 주위를 둘러보다 교탁에 앉아있는 사람의 실루엣에 입을 열었다.‥‥왜 안가고. 신타로의 물음에 드디어, 라고 중얼거린 쿠로하는 종이컵을 들고 흔들거렸다. 아아, 보충이라고 분명 말하지 않았냐. 수업도 안 들어오고, 진학하기는 싫은가보다? 쿠로하의 능청스런 물음에 신타로는 입술을 잘근거린다. 시끄러워, 누구 때문인데. 그리 말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흘기던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저의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충은 뭔 놈의 보충, 다 맞았을 게 분명한데. 신타로의 말에 쿠로하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옳으신 말씀.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신타로의 물음에 쿠로하가 어깨를 들썩인다. 궁금해? 씩 웃으며 종이컵을 들고 걸어오는 것에 불길함이 느껴졌지만, 신타로는 그것을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가 다가오자 은은한 커피 향이 코를 자극한다. 사과 향이 아니라는 것에 묘한 괴리감을 느끼며 그는 쿠로하와 눈을 맞췄다. 

 "답안지 카드에 손을 좀 댔지." 

 "그럴 줄 알았다." 

  신타로는 이제 완전히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덕분에 당분간 내 학교생활은 좆됐네요. 개새끼야. 뒤이은 신타로의 말에 쿠로하는 쿡쿡거린다. 그래, 그러시겠지. 이거 미안해서 어쩌냐, 난 그냥 니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 보고 싶었을 뿐? 쿠로하의 말에 신타로는 비웃음을 흘렸다. 너랑 내가 무슨 사이라고? 신타로의 말에 쿠로하가 입가에 걸치고 있던 웃음을 지우며 가만히 신타로와 눈을 맞춘다. 곧, 쿠로하의 손에 들려있던 종이컵이 기울어짐과 함께 그 속에 담겨있던 뜨거운 액체가 신타로의 허벅지로 쏟아졌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재빠르게 바지를 털어냈다. 미쳤어? 미친 듯이 허벅지를 털어내고 나니 커피 자국이 짙게 남은 부분에서 유난히 열이 났다, 툭툭 털어내는 것으로는 부족했던 것일까. 당장 바지를 벗고 찬물로 씻어내지 않으면 화상에 입을 것이 분명했다. 붉게 열이 올라 곳곳에 물집과 생채기가 가득할 자신의 허벅지를 상상하니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피부의 쓰라림을 동반한 분노에 그는 고개를 홱 돌려 쿠로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전까지 뜨거운 커피가 담겨있던 종이컵을 주먹으로 꽉 쥐어 구기더니 어이쿠, 실수. 그리 말하며 능청스레 웃곤 종이컵을 자신의 가슴팍으로 던져버렸다. 저 재수 없는 씹새끼.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하고 눌러 담은 말이 속 안에서 쓰리게 식어갔다. 꼴이 말이 아니다, 완전히 젖어 축축해진 바지를 바라보던 그는 청년을 물끄러미 노려보다 곧 뒤로 돌아 저의 사물함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갗과 옷이 마찰하며 격한 통증을 유발했다. 평소 두 걸음, 세 걸음으로도 충분히 손이 닿았던 거리의 사물함은 이 순간만큼은 걸어도 걸어도 닿지 않는 끝 없는 길과도 같았다. 결국, 사물함의 손잡이에 손가락 끝을 거는 것에 성공한 신타로는 문을 열어 재끼며 손을 휘적거려 자신의 체육복을 찾았다. 겨우겨우 손끝에 닿은 천의 감촉에 그는 그것을 홱 잡아당겼다. 

  남색의 긴 체육복 바지가 손에 잡혀 끌려 나온 것을 확인하자마자 신타로는 신경질적으로 사물함의 문을 쾅 닫아버리고 몸을 돌려 앞에 있던 의자의 등받이에 체육복을 걸어놓고 벨트를 풀어나갔다. 허나 그것도 아주 잠시, 제 앞에서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며 바라보고 있는 새끼를 자각한 그는 손을 휘적거리며 나가라는 의사를 표했다. 쿠로하는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저 자신과 교실의 출입구를 번갈아 가리키다가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가라고? 쿠로하의 물음에 신타로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 청년은 턱을 괴고 눈썹을 추켜세렸다. 무엇이 그리도 불만이신지, 오히려 불만을 가져야 하는 쪽은 나라고. 억울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학교생활도 좆 되고, 허벅지가 다 데도록 뜨거운 커피까지 맞은 마당에 내가 네 앞에서 바지까지 벗고 스트립쇼를 해야겠냐? 질렸다는 듯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하며 오만상을 찌푸린 신타로의 앞에서 쿠로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존나 골때리는 새끼. 욕이 절로 나오는 뻔뻔함이다, 신타로는 애써 침착함을 찾기 위해 숨을 들이마시고, 다소 진정된 상태로 입을 열었다. 제발 꺼져요. 그리 말하며 오른손의 가운뎃손가락을 쭉 피고 손등을 쿠로하에게 보이며 고개를 까딱인다.

  이 정도로 욕을 처먹었으면 저도 질려 슬슬 사라져줄 만도 한데. 신타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쿠로하는 문을 향해 걸어나가지 않았다. 도리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저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한 채 신타로는 물끄러미 쿠로하를 바라보았다. 쿠로하가 체육복을 걸어둔 의자의 바로 옆까지 다가왔을 때, 신타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의 체육복으로 손을 뻗었다. 허나 쿠로하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신타로보다 한발 앞서 의자에 걸린 체육복 바지를 잡아 뒤로 내팽개쳐버렸다. 이쯤 되면 내 바지에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좆같은 상황에서 신타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뭐 하는데, 미쳤냐? 제 앞을 막고 있는 이의 눈을 마주 보며 분노를 느낀다. 당장이라도 한 대 갈기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누르며 신타로는 저의 마지막 희망이 날아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안타까워 참을 수가 없다. 신타로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듣고 있는지, 듣지 않는지. 신타로의 분노 가득 담긴 호통에도 쿠로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신타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뒷목을 잡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이 무슨, 신타로는 속 안에서 심상치 않은 것이 끓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내 말 듣고 있냐? 애써 감정을 눌러 담은 채 신타로가 묻자 곧 쿠로하는 스트레칭 하던 것을 멈추고 가만히 신타로와 눈을 맞추다 씩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신타로의 벨트를 부여잡아 끌어당겼다. 그리고 하는 말이라는 것이. 

 "벗어, 벗겨줄까? 따갑다고 했잖아. 벗어야지." 

  란다. ‥‥하, 신타로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싫다, 선생님. 진짜 존나 싫네요. 그리 말하며 신타로는 쿠로하의 손을 쳐내고 천천히 벨트를 풀어나갔다. 진짜 좆같은 새끼.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것도 선생 새끼라고, 잠시나마 제대로 된 선생님이네, 그리 생각했던 저를 질책하며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선생님, 진짜 좆같아요. 신타로의 말에 쿠로하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알아. 


  가장 두려운 건 사람들 시선이에요. 쿠로하는 신타로의 말에 고개를 돌려 신타로를 바라보았다. 네 녀석이? 의외네. 분명히 그런 답이 돌아올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의외로 쿠로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알고 있어.'라고 답한다. 신타로는 쿠로하의 얼굴을 흘끔거리며 마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완벽한 인간도, 똑똑하고 현명한 인간도 아닙니다. 쿠로하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거린다. 알고 있어. ‥‥모르는 게 뭔데요? 쿠로하의 대답에 신타로는 그에게 고개를 돌려 그와 눈을 맞췄다. 글쎄. 애매한 대답 속에서 신타로는 인상을 찌푸리며 쿠로하에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진다. 당신이 제대로 된 선생님이 아니라서 한순간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제대로 된 선생님이 아니라는 건 조금 충격이네. 보고 싶었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내 답안지 카드를 바꿨을 때부터 당신은 이미 또라이였어. 신타로의 말에 쿠로하는 그저 하하 웃으며 죽고 싶지?'라고 묻는다. 살고 싶은데요. 그러시겠지. 신타로는 고개를 돌렸다. 쿠로하의 등에 고개를 기대며 눈을 감은 그는 천천히, 그에게 물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하셨죠." 

  신타로의 물음에 쿠로하는 느긋이 눈을 감았다가 뜨며 입을 열었다. 그래, 좋아해. 신타로는 손을 뻗어 쿠로하의 커다란 손 위로 저의 손을 올렸다. 

 "저도 좋아해요. 비록 좆같은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것 참 고맙네."  

 "그러니까 사귀어요." 

 "‥‥그것 참 고맙네." 

  별말씀을. 쿠로하의 답에 어깨를 으쓱거린 신타로는 그리 말하며 숨을 들이마셨다. 은은한 커피 향은 저녁노을에 묻혀 녹아들고, 맡아본 적 있는 달콤한 사과 향이 코끝에서 빙글빙글 돌아 온몸에 내려앉는다. 더는 상관없지? 쿠로하의 물음에 신타로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짧게 답한다. 예, 더는. 










공백제외 7709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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