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지코 - 오만과 편견
언젠가,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비록 화끈하게 뜰 정도의 커다란 사건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쿠로하에게 키사라기 신타로의 존재는 세상 그 무엇보다 커다란 사건과도 같았다. 어린 소년, IQ 측정 결과 168. IQ168의 천재 소년, 11살에 생물학을 익히다, 등의 수많은 이야기가 나돌았다. 어째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가. 어쩌다가? 자세한 이유를 파헤치자면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글쎄, 어쩌면 이런 걸 바로 운명이라고 이야기하는지도 모르지. 쿠로하는 천천히 신문을 오려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키사라기 신타로를 향한 쿠로하의 관심은 점점 사그라지기만 했다. 키사라기 신타로의 관한 뉴스는 더 이상 없었다. 물론 동네에서 떠도는 수군거림은 상당했지만. 참, 그 녀석도 수고가 많네. 고생하네. 얼굴 한 번 실제로 본 적 없는 상대를 동정하며 쿠로하는 매번 혀를 찼다. 어쩌면 그것 또한 관심이었을지, 누가 알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것을 뜻하는구나. 그는 19살 때 그것을 깨달았다. 다시 시간은 흘러 저가 22살이 되었을 때, 그는 직업을 구하려 했다. 집에서 그저 놀기에는 부모 눈치도 보이고, 어떻게 할까. 자신의 진로를 두고 대충 고민하기를 몇 시간. 그는 턱을 괴고 책상 위에 앉아 눈을 끔뻑거렸다. 하기야, 이런 거 신경 써서 고를 필요가 뭐가 있겠냐. 안 해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데.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며 대충 노트를 덮은 그는 책상 위로 엎어져 책상 위에 이마를 처박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깜깜해진 시야 사이로 조금 전까지 바라보고 있었던 것들이 잔상처럼 남겨져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쿠로하는 대충 그것들을 가만히 훑어보다가, 어느 순간에. 어느 부분에서 눈길을 멈췄다. 번뜩, 눈이 절로 떠진다. 그는 천천히 책상의 서랍을 열어 그 안을 뒤적거렸다. 여기 어딘가에‥‥. 쿠로하의 손길이 바빠진다. 그는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회색의 까슬한 종이 쪼가리 하나가 손에 잡혔을 때, 은근한 쾌감을 느끼며 그는 구겨진 종이를 샅샅이 펴 천천히 읽어나갔다.
저가 18살 때, 소년은 11살. ‥‥그렇다면 지금은? 짧은 물음이 저의 머리를 빠르게 스쳤다. 16살. 소년의 나이는 올해로 16살이렸다. 쿠로하는 입맛을 다셨다. 아, 이거 완전 운명 아니냐? 저 혼자 낄낄대며 그는 천천히 종이 쪼가리를 접어 책상 한구석에 올려놓은 채 침대로 다가가 털썩 엎어져 이불 속에 고개를 파묻었다.
"저 진로 정했어요."
"켁, 네 녀석이?"
제 말에 마시던 커피를 뱉어내는 꼴이 보통 우스워야. 그는 낄낄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 더럽네. 성격 파탄자인 제자 녀석이 어떤 일을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런 반응이 보통인 게야. 썩을 녀석. 켄지로의 말에 쿠로하는 어깨를 들썩거렸다. 서럽게. 제 성격이 뭐 어떻다고 이러십니까. 이 정도면 완전 양반 아닌지. 뭐, 몰락한 양반집 아들래미냐? 말도 참 곱게 하시네. 켄지로의 말에 쿠로하가 눈썹을 추켜세웠다. 허이구, 퍽이나. 무시하는 태도가 도드라지는 말투다. 죽을 때까지 제 아비 등골이나 빼먹고 살지 않으면, 하고 염려했는데 말이다. 저도 이제 성인이 아닙니까. 그래, 몸뚱어리만. 켄지로의 말에 쿠로하가 아오, 주먹을 꽉 쥔다.
그래서, 무얼 도와주랴. 켄지로의 물음에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리자 그는 들고 있던 커피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는 등받이에 천천히 몸을 기대어 저를 바라보았다. 무얼 도와주면 되겠냐는 말이다. 네 녀석, 이리 나를 찾아온 것을 보면 무언가 궁금한 게 있을 거 아니냐? 설마 저 취직합니다~ 정 없는 네놈 녀석이 꼴랑 그거나 알리기 위해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켄지로가 안경을 올리며 저와 눈을 맞춰온다. 쿠로하는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예예. 물론이지요.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며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봉투 하나를 꺼낸 그는 천천히 그것을 책상 위에 내려두었다. 이 녀석에 관한 것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는데요.
이 녀석? 켄지로는 올려진 편지봉투로 눈길을 옮긴다. 뭐냐, 뒷조사? 이제는 하다 하다 이런 일까지 시키는 게지. 인상을 찌푸린 그가 천천히 손을 뻗어 종이봉투를 집는다. 쿠로하는 손을 떼고,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서 그를 바라보았다. 켄지로는 쯧, 혀를 차며 편지 봉투를 들어 입구를 천천히 뜯어내고는 안에 있던 종이 두어 장을 꺼내 천천히 훑어나갔다. 키사라기 신타로?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의‥‥. 그는 지그시 눈을 감는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그러고 보니 요새 딸이 사귀었다는 글러 먹은 친구 놈의 이름이.
"대충 아는 녀석인데. 왜 그러냐?"
"아는 녀석이라고?"
"어어, 딸의 글러 먹은 친구놈이지. 거 참, 우연이네. 근데, 이놈이 왜?"
"그 녀석의 고등학교가 궁금해서요. 아는 놈이라면 잘 됐습니다, 좀 여쭤봐 주세요."
앞뒤 다 잘라먹고 그저 "알아봐 주세요."라고 이야기하는 꼴이라니. 켄지로는 허, 코웃음을 치며 쿠로하를 바라보았다. 묘하게 인상을 구기며 실눈을 뜨고 노려보던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새끼손가락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네 아비만 아니었어도 이런 일은 해주지 않는 건데. 단칼에 거절하며 저를 돌려보낼 것 같으면서도 또 그럴 수는 없는지 어휴, 한숨을 쉬며 의자를 돌린다. 딸애에게 부탁해보마. 그의 말에 쿠로하는 천천히 미소를 띄웠다. 아아, 부탁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곤 가볍게 묵례를 한 그는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끼익, 녹슨 쇳소리에 미간을 찌푸리며 문을 연 그는 곧, 켄지로의 목소리에 그를 살짝 돌아보았다.
"아, 그래서. 너 뭐 하겠다고?"
"선생님이요."
싸늘한 바람이 저의 몸을 스치며 온몸에 냉기를 뿌린다. 벌써 겨울인가. 앙상하게 말라 살짝만 힘을 주어도 금방이라도 꺾여버릴 것 같은 것이. 씁쓸함을 맛보게 한다. 그는 좀 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선생님이라고 말했던 것이, 퍽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켄지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허어? 숨을 내뱉던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네 녀석이? 별일이네. 무슨 과목? . ‥‥글쎄, 씩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닥거리던 그가 중얼거렸다. 국어 선생님 정도면 어떨까요? 딱히 문제는 없을 것 같네. 켄지로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그만 가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럼 됐고요. 실례했습니다. 몇십 분 전의 기억이 홱홱 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청년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의식하고 원해서 지은 웃음이라기보다는,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는 기쁨에 절어 더는 절제하지 못하는 소년과도 같은 순수한 웃음이었다.
며칠 뒤, 켄지로에게서 한 번 찾아오라는 문자를 받은 쿠로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뛰어들었다. 나 잠깐 나갔다가 온다. 검은색의 코트를 걸치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방 밖으로 나온 쿠로하를 일제히 바라본 하루카와 코노하가 고개를 까딱거린다. 어디 가? 코노하의 물음에 쿠로하는 딱, 손가락을 튕기며 둘을 바라보다가 곧 씩 웃으며 비밀이다, 하고 나가버린다. ‥‥형, 어디 아픈가? 응? 기분 좋아 보이던데~ 아닐까? 하루카의 말에 코노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것 같아.
"선생."
쾅, 큰 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 재낀 쿠로하가 급하게 들어와 문을 닫았다. 덕분에 컵라면을 흡입하고 있던 켄지로는 그대로 쿨럭거리며 입안에 있던 면을 모조리 뱉어내며 기침을 했다. 컥, 커억,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뱉어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쿠로하는 아오, 더럽게. 그리 중얼거리며 손사래를 치다가 켄지로의 살기 어린 눈빛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켄지로는 계속해서 기침하다가, 천천히 저의 옆에 놓여있던 물컵으로 손을 뻗어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대충 입가를 닦아내고, 컵라면 용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는 큼. 작게 기침을 하다가 젠장맞을 녀석, 하고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뻗어 접객용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기 서류 봉투 안에 담아놨으니까, 대충 가져가고 다음부턴 들어오기 전에 노크해라. 망할 자식아. 켄지로의 말에 쿠로하는 재빨리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갈색의 서류봉투를 낚아채듯 잡았다. 감사. 대충 묵례를 하며 인사한 그는 미처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을 참지 못하고 봉투를 뜯어내 종이를 꺼냈다. 성격 급한 새끼, 켄지로의 따가운 눈빛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쏘냐. 그는 테이블 옆의 가죽 소파로 다가가 털썩 주저앉았다. 한 장, 한 장.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들과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지극히 사사로운 그 모든 것들. 호기심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던가, 생각하며 쿠로하는 종이를 천천히 눈으로 훑어나갔다.
"그 녀석, 상당히 어려운 녀석인 것 같더만."
어느새 의자를 돌려 쌓인 서류에 사인을 시작한 켄지로가 입을 열었다. 어려운 녀석? 뭐, 집안 사정? 쿠로하의 물음에 켄지로가 잠시 쿠로하를 힐끔 바라보았다. 아니, 인간관계 말이다. 천재들이 다 그렇지, 나도 그렇잖아. 넌 그냥 또라이고. 켄지로의 말에 쿠로하는 인상을 구겼다. 이렇게 정상적인 또라이 보셨습니까. 오오냐, 적어도 내 인생은 온갖 또라이들이 판치는 인생이었단다. 젠장, 차마 부정할 말이 없다. 미간을 엄지손가락으로 꾸욱 누르고 있던 청년은 이어 다음 장을 넘기며 천천히 눈으로 그 내용을 훑어나가는 것을 계속했다. 켄지로는 그 뒤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친구라고는 없는 모양이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 최근 우리 착한 딸, 아야노가 놀아주겠다고 두 팔 걷어 올리고 나섰다만. 평생 친구라고는 제대로 사귀어본 적 없을 놈이 사람을 어떻게 사귀면 좋을지 알고나 있을까. 차갑게 대한다느니, 겉멋만 잔뜩 부리며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인데 말이야‥‥. 역시 이래서 똑똑하다는 것들은."
켄지로의 말에 쿠로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 예. 대강대강 흘리듯 대답하며 목 끝까지 차오른 단지 딸이 무시당하는 게 싫은 것뿐이겠지. 라는 말은 애써 꾹 삼켜 내려보낸 채. 그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뭐, 그래도 아야노 녀석과 같은 학교를 지원한다는 것 보면‥‥. 핫, 하지만 이 녀석 말이야. 혹시라도 우리 딸애한테 이상한 마음을 품고 있는 거라면 어찌하느냔 말이지. 이러언‥‥, 오면 확실하게 교육을 시켜놓아야‥."
"뭐라고요?"
"아니, 그러니까 이 녀석이 우리 학교로 온다고 했다 이 말‥‥."
켄지로의 말을 가로채며 다시 한 번 물은 쿠로하가 켄지로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선생네 학교로 온다고? 쿠로하의 물음에 켄지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여기로 온다. 이 말이야.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신이 맺어준 인연 같은데. 얼마 전에 보았던 소설 한 권을 생각해내며 쿠로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것 참. 아주 기쁘게 만들어주시는구만. 켄지로의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뒤로 한 채,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들을 서류봉투에 곱게 넣었다.
"학교에 국어 선생 자리 좀 하나 비워달라고 연락 드려주세요."
"야, 야, 그게 내 마음대로 되냐?!"
"아버지 이름은 폼입니까."
"네 녀석 말이야‥‥, 그러다 죽을 때까지 아버지 등골이나 빼먹을 셈이냐?"
"뭐, 그래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는 게 맞지요."
"지독한 녀석‥‥."
켄지로의 말에 어깨를 들썩거린 쿠로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뭐, 그런 바로. 잘 부탁합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천천히 손을 흔들어 보이며 문을 나섰다. 완전히 다 알았다. 완전히. 자신에 손에 들린 갈색의 서류봉투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는 오만스럽게도 그런 생각을 했다. 키사라기 신타로는 저의 것이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생각.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그는 힘있게 발을 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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