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했는데요."
미쳤나. 쿠로하의 말에 켄지로는 마시던 것을 그대로 뿜어내며 연신 켁켁거렸다.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며 옆에 있던 휴지를 재빨리 뽑아 저의 입가로 흘러내리는 커피를 닦아낸 후 가죽 의자에 묻은 것을 살살 닦아내던 그는 천천히 휴지를 구겨 옆에 놓여있던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방금 저 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들은 사람 없냐? 과학실에 저 말고 누군가가 더 있었다면 그렇게 이야기했을 것이 분명했다. 갑작스러운 쿠로하의 폭탄 발언에 번개 맞은 듯 거한 충격을 받은 남성은 아이고, 머리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마를 짚었다. 이번에도 뭔가 부탁할 게 있나? 아니, 아니지. 신타로 녀석과 잘 안 되는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왜 여기 와서 지랄이냐고? 침착하게 숨을 삼켜낸 그는 흘러내린 안경을 집게손가락으로 올리고 옅은 숨을 내쉬며 이윽고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청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는 이유는 뭐고?"
저의 물음에 쿠로하는 뭐……. 하고 중얼거리며 천천히 소파에 몸을 기댔다. 마치 제집에 온 것처럼 편안하게 누워있는 것이 우스워서야. 켄지로는 푸, 헛웃음을 지으며 쿠로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들고 있던 서류를 테이블 위로 홱 던져버리고 펜을 입에 물고 고개를 젖힌 채 눈을 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모든 것들이 어둠에 젖어 묻혔다. 그리고 곧, 교복을 입은 저의 모습이 소리없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쿠로하가 타테야마 켄지로를 사제지간의 연이 아닌 이성으로서 바라보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의 여름이었다. 도대체가, 언제부터냐고 물어온다면 알 턱이 있나. 그저 오래오래 함께 지내왔으니 자연스럽게 정이 쌓이고, 그 쌓인 정에서 또다시 자연스럽게 사랑이란 감정이 싹 튼 것뿐이겠지. 그는 그런 감정에 대해서 의외로 담담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누그러졌을 때도 그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감정에 무딘가? 그런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렇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순간부터 감정에 무디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타이밍은 지난 게 아닌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앞을 바라보니 그 앞에는 여전히 턱을 괴고 중얼중얼 책을 읽어내리며 성의 없는 수업을 하는 남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떻게, 고백이나 좀 할 수 있으면 좋았겠지마는. 그에게는 어여쁘고 다정한 아내도, 사랑스러운 딸도 있지 않은가. 이야, 완전히 망했네. 이거. 어조 없이 툭툭 뱉어내고 중얼거린 그는 책상에 엎드려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천천히 잠이 들 것처럼 온몸으로 나른함이 밀려 들어오며 주위에서 들려오던 잡다한 소리 또한 라디오를 끈 것처럼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편안하게 잘 시간이다. 그리 생각하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고 있으려니 갑작스럽게 저의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무언가의 조각에 그는 아 씨발. 욕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저의 머리를 때리고 바로 앞으로 떨어진 것은 분홍빛을 띠고 있는 작은 분필 조각이었다. 아.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누가 던진 것인지를 깨닫고 앞을 바라보자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노려보고 있던 켄지로는 눈빛으로 무언의 압박을 주며 앞을 볼 것을 강요했다. …해가 서쪽에서 떴나, 아니면 이미 꿈인가. 켄지로의 성실한 태도에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던 복도를 지나가는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하고 아. 씨발, 이사장 왜 지금 지나가고 지랄이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인상을 구겼다. 그는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고 켄지로를 바라보다가 턱을 괴고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아, 날씨 존나 좋다. 찝찝하고 한참 구린 저의 기분과 다르게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흘러가는 하늘이 야속해서 그는 눈을 찡긋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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