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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카게프로

[신아야] 오만의 대가

 

 

 













  한 여름, 도저히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연신 몸을 흔들어대던 검은 아스팔트 위에서 나는 몸을 휘청대면서도 꿋꿋하게 걷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로부터 반쯤 흘러내린 얇은 갈색의 가죽 끈을 잡고 올리며 쉬지 않고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항상 걷던 것을 멈추고 잠시 머무르던 붉은색 자판기 앞에서도, 언제나 붉은 빛을 깜빡거리던 신호등 앞에서도, 덩그러니 놓인 대형스피커 안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듣기 위해서 아주 잠깐 걸음을 멈추던 붉은색 패널이 세워진 식료품 점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생활도 며칠 째더라. 방금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멍한 정신을 일으켜 세우고 가까스로 멀쩡한 생각 하나를 던져놓는다. 언젠가부터 흐릿한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게 없었다. 이전에는 적어도 여러 가지가 뵈었던 것 같은데. 예컨대 붉은색 머플러라던가, 붉게 칠해진 자판기라던가, 깜빡이는 신호등의 붉은빛 같은 것들. 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멍청한 녀석들의 목소리 같은 것도 조금씩 들려왔던 것 같고. 단지 움직일 수 있는 시체처럼,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만질 수 없고 아무거도 맛볼 수 없다. 언제부터였나, 신타로는 눈을 굴린다.

  타테야마 아야노가 있었다. 친구 비슷한 거. 워낙 발이 넓고 이리저리 관심 쏟아 붓는 것을 즐겼던 녀석이었기 때문에 본인은 저를 친구라고 생각 안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단 한 번도 말을 꺼내본 적은 없어도 암묵적으로 “친구”라고 인정한 이가 있었다. 처음부터 인생에 끼어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터인데. 붉은 머플러를 목에 칭칭 두르고 단정하게 머리를 내린 소녀가 머릿속에 그려질 때마다 어째서인지 그는 먼저 그런 생각을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함께 점심을 먹고, 쉬는 시간에 가끔 이야기를 하고, 방과 후에 학교에 남아 모르는 문제라며 가져오던 것을 풀어주고 함께 하교했던 것만 같은데 언젠가부터 사라진 그녀에게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물론 학교를 나오지도 않았고. 근처를 지나는 척 하며 얼굴이라도 한 번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주소를 알지 못하니 그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아서. 때때로 저의 집 앞으로 찾아오던 너의 모습을 그리며 어디 근처인지라도, 그런 생각을 한다. 표현하는 것이 서툴러서, 내뱉는 것이 어려워서. 갖가지 이유를 붙여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던 것들이 너의 부재와 함께 순식간에 파도처럼 밀려와서, 어떻게 반항할 틈도 없이 그대로 휩쓸려 잠기기 시작한 탓에 숨이 막힌다.

   그래서 다음 날 네 책상 위로 하얀 꽃병이 올라와 있었을 때에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얀색 꽃병, 그 안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녹색 줄기, 끝으로 힘없이 매달려 꽃병을 쓸어내리는 흰색 꽃잎. 언젠가 책에서 보았던 풍경이네. 주인공은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책상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머릿속으로 그릴 수 없었던 장면, 본적도 없는 수많은 가구들을 만들어 배치해놓고 밖에서부터 불어오기 시작한 바람에 흔들리는 하얀색 커튼까지 만드는 것은 성공했지만 나이를 얼마나 먹어도 줄곧 떠올릴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사람들. 그들이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을 나는 절대로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빠가 죽었을 때도, 그렇게 쉴 새 없이 재잘재잘 떠들던 여동생이 병원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잠에 빠져있었을 때도, 장례식장에서 검은 상복을 입고 한쪽에 주저앉아 있는 엄마를 보고 있었을 때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을 언제 또 느낄 수 있을까라고. 신타로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나무판 위로 박힌 둥그런 못 두 개가 손끝에 닿자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아무것도 쥐지 않은 손으로 꽃병을 쓸어 올리고, 늘어진 꽃잎의 끝을 엄지와 검지로 잡아 뜯으며 그는 자리에 주저앉는다.

  나는.

  돌아가자, 그리 말하며 네가 내 목에 둘러주었던 목도리의 감촉은 어땠더라. 저기, 아직 모르겠어. 알려줄 수 있을까? 그렇게 말하며 오답만이 가득하던 시험지를 보여주던 네 목소리는 어땠더라. 신타로. 내 이름을 부르며 보여주었던 웃음은 어땠더라? 모르겠어. 되돌아보니 더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새삼스러웠던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새 익숙해져서, 머릿속에 새겨진 답처럼 떠오르지 않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을 터였다.

떠오르지 않는 일이 어쩌면 당연하지. 애초부터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네가 어디에 사는지, 싫어하는 건 무언지, 좋아하는 것은 무언지,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어떻게 웃는지, 어떻게 우는지. 단지 두어 번 말을 나누었을 뿐인 사람의 죽음을 막으려고 했던 이유는 무언지. 나는 아무것도 알고 있지 못하니까, 이렇게 네가 없으면 떠올릴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다. 초콜릿을 잔뜩 입에 욱여넣은 것처럼 입이 쓰다. 눈으로부터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은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다르게 쓴 맛이 났다. 이런 맛이구나, 그런 것을 깨닫기도 전에 목구멍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기 시작한 숨을 차마 담아내지 못하고 나는 그저 뱉는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채 내용물을 뱉어내는 가방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빠르게 달려 계단을 밟고, 밟고, 밟고, 밟고. 별안간 눈앞으로 뚝 떨어진 낡은 철문의 문고리를 잡아당기어 열고 몸을 내던진다. 간신히 중심을 잡은 채 기울어진 몸뚱어리를 바로 세우고 빠르게 달려 붙잡은 철조망 밑으로 보이는 작은 종이학의 모습에 그는 또 다시 숨을 삼켰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야, 아무것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야! 나는, 사실은. 끝없이, 수많은 생각이 겹치고 겹쳐서 결국 나를 짓누르고, 나는 숨을 쉬지 못하게 될까봐 그게 그리도 두려웠던 거다.

 더 이상은……. 끝까지 내뱉지 못한 말의 끝이 미미하게 떨린다. 철조망에 머리를 처박고 시선을 떨어뜨리며 단지 흰색 선으로 그려진 너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제 이름을 부르며 뒤돌아서면 흩날리던 갈색의 얇은 머리카락도, 그 찰나의 순간 눈을 휘며 웃던 얼굴도 이제는 볼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것을 차마 믿을 수 없어서.

 “잊지 않아.”

  내뱉는 숨을 해치고 기어 나온 말은 눈물에 젖어 금세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오늘은 일찍 돌아가.”

  옥상에서 내려온 후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컨디션을 걱정한 탓인가, 단순히 이번 기회를 통하여 신뢰를 얻고 싶은 것일지도 몰랐다. 옷감이 겹치는 부분에 박혀 빛을 내는 검은색 단추를 멍하니 보고 있던 신타로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럼, 오늘은 돌아갈게요. 감사합니다. 진심 없는 인사치레, 어깨에 걸린 가방끈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몸을 돌린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투두둑, 투두둑. 도움을 필요로 하는 빗방울들은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날, 아무도 없는 교실 안에서 홀로 눈물을 흘리고 있던 소녀를 상기시키기 위함인 듯해서 눈을 질끈 감았으나 그럼에도 여전히 귀를 후벼 파는 소리가 견딜 수 없이 애처로워 그는 걸음을 멈췄다. 몇 십 번의 달궈짐을 참아냈을 네모난 틀 안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한 것인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회색하늘이 펼쳐져 있다. 울룩불룩 솟아난 콘크리트 더미에서는 여전히 붉은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내일은, 볼 수 있을까.

  손끝에 닿은 것이 몸서리를 치고 싶을 정도로 차디 찬 탓에 그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죄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으로. 힘을 주어 오른쪽으로 밀기 시작하니 녹슨 소리를 내며 열린 창문에서 손을 뗀다. 소리 없이 젖어가는 바닥을 내려다보던 소년은 코를 한 번 훌쩍이고 소매로 눈이 빨갛게 부어오를 때까지 비벼대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For. @RNShintaro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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