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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리퀘스트

[히스님/하루타카] 기억


















  어디선가 맡아본 적 있는 비릿한 향. 예의상으로라도 좋다고 이야기할 수 냄새가 하루카의 코를 비집고 들어와 그의 후각을 쉼 없이 자극한다. 이유 모를 두려움을 애써 저의 가슴속에 꾹 밀어 넣은 채, 소년은 천천히 눈을 떴다. 분명 저는 눈을 떴다고 생각했음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저의 눈이 멀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저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공간이 도저히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어둠으로 꽉꽉 메워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소년은 이상함을 느꼈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저의 손에 끈적하게 묻어난 것을 바라보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저의 손에 묻은 액체만은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곧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순간 그런 시답잖은 의문 따위는 어찌 되든 좋다고 생각했다. 진득하게 눌어붙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액체. 어찌 보나 사람이 살아있을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체액. 그는 그것의 이름을 미친 듯이 뇌를 쥐어짜며 찾았다. 피, 피라고 불리는 그것이었다. 하루카는 작게 탄식하며 뒤로 물러났다. 어? ‥어라? ‥‥도대체 왜? 생각해야만 한다. 생각해야만 한다, 생각해야 한다. 당장에라도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미친 듯이 돌리며 기억을 떠올리려 애쓰기 시작한 하루카는 곧 발꿈치를 두드리는 무언가에 의해서 뚝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방금 뭐가.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앞을 보아도, 옆을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하루카는 꼴깍 침을 삼켰다. 도대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자신은 어쩌다 여기에 오게 된 것이며, 도대체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에서는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두려움에 절로 몸서리를 친 그는 이번에는 발꿈치에 무언가가 닿았던 방향의 반대쪽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때, 갑작스럽게 저의 눈을 찔러오는 강한 빛에 하루카는 손을 들어 눈가를 가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어두웠던 시야가 밝게 트이기 시작하며 저 자신이 존재하는 이곳이 어디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무대 위, 붉은색의 커튼이 인상적인 무대 위에서, 하루카는 홀로 서서 객석을 등진 채 무대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어째서‥‥. 그리 중얼거리며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려 무의식적으로 아까 무엇인가 닿았던 바닥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천천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곧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던 하루카는, 곧 그것의 정체를 알아내고 비명을 지르며 털썩 뒤로 주저앉아 엉덩방아를 찍었다. 아아, 아아, 아아! 도대체 이게 뭐야, 도대체 이게! 자신의 눈앞에 놓인 현실을 부정하며 하루카는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야, 이런 건 아니야. 이런 게 어째서. 하루카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 뒤로 물러났다. 여성의 잘려나간 손으로 보이는 그것은, 철철 피를 흘리며 마치 발작하듯 연신 다섯 개의 손가락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가며 땅을 받쳐 몸을 지탱하고 있던 팔에 힘이 빠진다. 하루카는 그 괴랄한 형상에서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바라보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손을 등지고 뜀박질할 준비를 했다. 도망쳐야 한다. 생존을 위한 본능만이 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허나, 그가 객석으로 눈을 돌린 순간. 그는 딱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시체들. 썩어 문드러진 시체들이 마치 저의 무대를 구경이라도 하는 것처럼 곳곳에 앉아 빛없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루카는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는 아무것도. 그는, 아, 아, 아, 아, 아아. 그저 두려움에 가득 절은 숨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도대체 어떻게 된.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멍하니 서서 그 시체들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공포로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하루카는 뒤에서 들린 여성의 목소리의 고개를 홱 돌렸다. 

 "도망쳐, 하루카!"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 그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타카네? 타카네가 여기 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저의 귀를 후비고 뇌에 박힌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를 만났다는 것에 안심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녀가 이런 일에 휘말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완전히 절망한 채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치 누군가에게 잡힌 것처럼, 팔을 뒤로 꺾은 자세로 서서 저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하루카는 타, 타카네. 짤막하게 더듬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타카네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저 도망치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도망쳐, 하루카. 도망쳐, 제발 여기서 도망쳐, 여기서 나가야 해! 하루카!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온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싸늘한 공포로 뒤덮여 움직일 수 없다. 하루카는 손을 뻗었다, 타카네. 같이 나가자. 그렇게 하며 손을 뻗지만 잡히지 않는다.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저와 그녀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팔을 뻗었음에도 그녀는 잡을 수 없다. 잡지 못한다. 여전히 저에게 도망치라고 소리치는 그녀를 바라보며 하루카는 거의 울 것 같은 지경이 되었다. 

  그때였을까. 탕. 굉음이 공간을 울리며 저의 앞에서 소리치고 있던 소녀가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마치 줄 끊긴 인형처럼 바닥으로 내던져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하루카는 미끄러지듯 주저앉아 타카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타카네? 그녀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저 가만히 고개를 바닥에 대고 있을 뿐이다. 아. 아! 아아! 아아! 하루카의 입에서 울음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타카네. 서글프게 타카네의 이름을 부르며 그는 몸을 움직여 그녀의 팔을 잡았다. 타카네. 왈칵왈칵 차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내뱉으며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고 고개를 숙여 눈물을 흘린다. 제발 그만둬, 제발‥‥. 그렇게 같은 말을 반복하며 중얼거리고 있을 때, 뒤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짝짝짝. 마치 멋진 작품을 구경하고 그것에 대한 감동을 곱씹으며 진심으로 환호하는 사람처럼. 느릿하면서도 힘이 들어간 박수 소리에 하루카는 몸서리를 쳤다. 소리가 울려 퍼진 후의 무거운 정적. 하루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누구야? 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하루카는 천천히 타카네를 바닥에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렸다. ‥‥누구 있나요? 무거운 정적을 깨고, 저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공간을 울린다. 하루카는 천천히, 무대 바깥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무대의 가장 끝에서 객석을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을 때. 

  철컥. ‥‥총을 장전할 때나 들을 수 있는 소리, 무거운 소리가 뒤통수를 통해 진동으로 바뀌어 온몸을 울렸다. 하루카는 몸을 뻣뻣하게 굳히고 눈동자를 굴렸다. 저의 목 뒤로 차갑게 닿아오는 것의 정체를, 하루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못하고, 그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이의 모습을 어떻게든 두 눈으로 확인하려 애썼다. 

 "‥‥이제 드디어 벗어났구나, 그렇게 생각했어, 주인?" 

  ‥‥‥온몸에 흐르던 피가 싸늘하게 식어 굳는다. 하루카가 무어라 지껄일 틈도 없이 시야가 까맣게 물들어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 ‥‥아아." 

  하루카는 발작하듯 벌떡 몸을 일으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거의 흐느끼듯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울기 시작한 그가 꿈에서 깨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는 연신 숨을 몰아쉬며 눈물을 흘렸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 모든 광경이 저의 머리를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친구들의 죽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고통에서 아직 자신이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뒤의 극단적인 두려움. 아, 아아! 그는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미쳐버릴 것만 같다. 미쳐버릴 것만‥‥. 다시 한 번 빼앗기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 번 몸을 빼앗기고, 친구들을 저의 손으로 죽여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저의 손으로 갈기갈기 찢어서, 또다시 혼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또다시 옆에 아무도 없이 죽지도 못하고, 살아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잔혹한 그 생활을. 다시 한 번 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한 번 수면 위로 떠오른 두려움과 불안은 마치 병균처럼 이곳저곳에 들러붙어 증식하기 시작한다. 하루카는 고개를 숙였다. 제발 그만둬 줘. 그 정도 했으면 됐잖아. 더는 괴롭히지 말아줘. 그런 소리를 하며 울고, 울고, 울고, 울고, 한참을 소리내지 못하고 울어대던 그는 들리오는 목소리에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하루카?"  

  막 잠에서 깨어 눈을 비비며 저의 이름을 부른 타카네를 바라본 하루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울면 안 돼. 이 이상은‥‥. 하지만 몸은 그런 저의 생각을 순순히 따라주지 않는다.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계속해서 쏟아지는 눈물에 하루카는 몇 번이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내며 숨을 죽였다. 타카네는 잠시 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몸을 손을 뻗어 저의 얼굴을 붙잡는다. 악몽 꿨지? 에둘러 이야기하는 것 하나 없이 이미 예상하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 하루카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는 소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숨을 내쉬며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에 있던 커튼을 싹 걷어버린 후 침대 옆에 있던 스탠드의 전원을 올렸다. 커튼을 걷자 달빛이 투명한 창문 건너로부터 방 안에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스탠드의 전원이 들어옴과 동시에 방 안의 모든 어둠이 구석으로 밀려 저에게 다가오지 못한다. 타카네는 자신을 안심시키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밝게 조명을 비춘 후, 곧바로 저를 끌어안았다. 

  귀가 먹먹해지고, 눈앞이 흐릿해지며 따뜻한 온기가 온몸을 타고 돌기 시작한다. 정신이 붕 뜨는 것처럼 멍해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하루카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두근두근, 작게 들리는 소리가 곤두섰던 신경을 안정시키며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현실로 저를 다시 끌어오기 시작한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 타카네. 고마워. 타카네의 물음에 하루카는 고개를 끄덕거린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하루카의 등을 토닥거리는 타카네의 뒤로 푸르스름한 새벽의 빛이 새어들었다. 이제 다 끝났어. 마치 세상이 제게 그것을 속삭이는 것만 같아서 소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이 든 걸까.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기 시작한 품속의 하루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그시 눈을 감고 잠에 빠진 하루카의 얼굴이 눈에 띈다. 모든 것이 끝났던 날, 그 어느 누가 그 날의 참상을 잊어버릴 수 있었겠는가 생각하지만 역시 무어라 해도 그것을 가장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중에 이 녀석은 반드시 포함될 것이다. 그것이 언제나 안쓰럽고, 미안해서‥‥. 생각만 해도 목이 막혀오는 것만 같다. 그녀는 천천히 하루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해. 그렇게 말하니 저조차도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아아. 기억이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에노모토 타카네가 코코노세 하루카의 이상징후를 처음 눈치챈 것은 쿠로하, 그러니까 맑은 눈의 뱀이 완전히 소멸한 이후 아이들이 돌아온 해의 겨울이었다. 그 날 이후 타카네와 하루카는 자주 만나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대학이라거나, 하고 싶은 일이라거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앞으로의 걸어갈 길을 찾아 고민하고 있었던 그 시기. 타카네는 아니나 다를까 그 날도 하루카와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역시 하나도 풀지 못하고 하얗게 방치된 문제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타카네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는 머그잔 두 개를 양손에 들고 저에게로 걸어오는 하루카를 발견하고 고개를 돌렸다. 하루카는 왼손에 들고 있던 머그잔을 살짝 저의 앞에 놓아주고는, 그대로 맞은편의 소파에 앉아 방글 웃으며 저를 바라보았다. 

 "앗, 타카네. 아직 풀고 있었구나." 

  그리 말하며 흑심 자국이라고는 눈 씻고 보아도 찾아볼 수 없는 새하얀 도화지와도 같은 상태의 문제집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저를 바라보는 모습이 퍽 얄미워 타카네는 입을 삐죽거리며 몸을 뒤로 젖혔다. 그녀는 쭉 팔을 뻗어 기지개를 한 번 하고는, 그대로 문제집 위로 엎어져 눈을 감았다. 빽빽한 종이에서 나는 특유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히며 정신을 흩트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고 농땡이를 까고 있는 저에게 말을 걸며, 대답을 듣고, 이야기를 나누던 하루카는 어느 순간부터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게 되었다. 밖에 뭐가 있어? 조용해진 하루카를 가만히 바라보던 타카네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혼이 쏙 빠진 얼굴로 타카네의 물음에 응?'하고 되물으며 잠시 타카네와 눈을 마주하다가, 저기‥, 타카네. 나 잠시만‥‥. 하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서부터. 타카네는 정확히 이 부분에서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무언가 평소의 하루카와는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루카가 화장실의 간판이 붙어있는 복도의 안쪽으로 사라지자 타카네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있던 문제집과 필통을 모조리 가방 안에 밀어 넣고 가방을 소파 위에 던지듯 올려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화장실 있는 복도 쪽으로 향했다. 

  차마 다른 사람의 눈이 걸려서, 그녀는 화장실의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 서서 하루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나 몇십 분이 지나도 그가 나오지 않음에 이상함을 느끼며 손을 뻗어 화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하루카, 괜찮아? 하루카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뭐지? 설마 쓰러졌나? 아니야, 그럴 리가‥‥. 묘한 불안감이 서서히 자신을 덮치기 시작한다. 설마, 설마‥‥. 입술을 꾹 깨물고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르며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는다. 

 "하루카. 대답해." 

  제발 어떤 목소리라도 좋으니 들려주기를, 그렇게 바라며 타카네는 천천히 문에 귀를 대고 집중했다. 제발 들려라, 아무 소리나 들려라. 애원하듯 연신 중얼거리며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온몸의 신경을 쏟아붓자 비로소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예상했던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날카롭게 귀에 박히자 타카네는 재빠르게 화장실의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루카! 잠겨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문은 생각보다 쉽게 열리며 안에 있던 것을 드러냈다. 하루카는 마치 금방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과하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을 반복하다가 심장을 부여잡으며 변기에 고개를 처박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토해내고 있었다. 

  이게 무슨‥‥. 타카네는 할 말을 잃고 그저 하루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어째서? 여러 가지 의문이 저의 머리를 강하게 때린다. 허나 그녀는 더는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지난날, 저와 하루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에 일어났던 그 일─하루카가 발작을 일으킨 것을 알지 못하고 그저 지나쳤던─을 다시금 상기하며 하루카에게로 달려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하루카, 괜찮아? 무슨 일이야? 연신 질문을 하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채로 등을 두드리지만 하루카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잠시 저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그대로 다시 욱, 으윽‥‥. 으아‥. 하고 속을 게워낼 뿐이다. 타카네의 마음 깊은 곳에 두려움이 튼다. 아, 아아, 아아. 이대로 잃는 건 아닐까, 그런 두려움이 천천히 싹트기 시작했다. 


  하루카는 소파 위에 앉아있었다. 소파 위에 앉아서, 몸을 반쯤 뉘이고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어느새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창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타카네는 따뜻한 물이 담긴 머그잔을 하루카에게 건넸다. 저가 머그잔을 내밀자 고개를 까딱거리며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는 것을 타카네는 마셔, 따뜻한 물이야. 라고 이야기하며 반쯤 강제로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하루카는 저에게 쥐어진 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거리며 한 모금 입에 담아 삼켰다. ‥‥언제부터 그랬어? 타카네의 물음에 하루카가 컵을 기울이던 것을 멈추고 그대로 고개를 들어 타카네와 눈을 맞췄다. 

 "‥‥타카네, 나 정말 괜찮으니까." 

 "시끄러워." 

 "‥‥정말 괜찮아." 

 "뭐가 괜찮은 건데!"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는 하루카의 얼굴을 보니 화가 치닫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른 타카네는 곧 입을 꾹 다물고 하루카를 노려보았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 그게 괜찮을 리가 없잖아. 울고 싶지 않았는데, 이렇게 우는 소리 내고 싶지 않았는데. 얼굴에 붉게 열이 올라 당장에라도 터질 것만 같다. 두근두근 뛰던 심장이 식도를 타고 머리 위로 올라와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것만 같아서 멍해지는 정신을 애써 붙잡아 꿀꺽 삼킨다. 아. 타카네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한동안 눈을 감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은 채. 그저 눈을 감고,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이며 입술을 꾹 깨문다. 

  곧, 그녀는 저의 아랫입술에 무언가 닿아오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뜨고 앞을 바라보았다. 하루카는 타카네의 입술 위에 저의 엄지손가락을 올려놓고 빙그레 웃으며 괜찮아. 그렇게 이야기해왔다. ‥‥그 모습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강한 척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정말로 괜찮다고,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은 저의 마음을 하나도 알아주지 않는 것만 같으면서도,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것만 같아서, 타카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가에 고이는 눈물을 떨어뜨리며 팔을 뻗어 하루카를 끌어안았다. 이제는 괜찮아, 괜찮아, 하루카. 주문을 외우듯, 분명히 괜찮아질 것이라고 중얼거리자 응, 타카네, 이제 다 끝났어‥‥. 라고 막힌 소리를 내며 답해온다. 

  

 "같이 있게 해줘, 같이 있고 싶어."

 "응‥. 타카네만 괜찮다면, 나라도 괜찮다면‥."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다시 목이 막혔다. 



  그 이후로, 그들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언제나 같이 밥을 먹었고, 언제나 같이 음악을 들었고, 언제나 같이 티비를 보고, 언제나 같이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때때로 하루카가 증상을 일으키는 날이면 타카네는 언제나 그를 끌어안아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다. ‥갓난아기가 가장 좋아하는 소리라고 했던가. 너, 진짜 완전 꼬맹이 같네. 우스갯소리로 그리 말할 때면 하루카는 너무해‥ 하고 입을 삐죽 내밀며 저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괜찮아질 거야. 타카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이런, 완전히 늦었다. 그녀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몇 시야? 전까지만 해도 푸르스름했던 하늘이 이제는 완전히 맑게 개어 부드러운 햇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슬슬 아침이라도 준비하는 편이 좋겠지. 하루카가 일어나기 전에‥‥. 타카네는 천천히 앉아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켜져 있던 스탠드의 전원을 내리고, 옆에 놓여있던 라디오를 틀었다. 그리고 거실로 나와 부엌으로 향하려던 찰나에 딩동. 작게 벨 소리가 울린다. ‥이 시간에? 

  

 "누구세요?" 

 "나." 

  누구냐는 물음에 이름은 밝히지 않고 그저 "나"라고 소개하는 꼴을 보니 어떤 녀석인지 확실하게 실루엣이 그려진다. 재수 없는 녀석. 작게 중얼거린 타카네는 바로 현관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야? 녀석의 얼굴을 쳐다보자마자 툭 뱉어내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선배 주려고 케이크 사왔 거든, 그리 말하며 분홍색의 예쁘게 칠해진 종이상자를 내밀어 온다. 이른 아침부터 케이크라니, 어이가 없으려니까. 타카네는 혀를 차며 그것을 조심스레 받아들고 손짓했다. 들어 와. 타카네의 말에 신타로는 아주 익숙하게 신발을 벗어 놓아두고, 발을 들이자마자 선배는? 하고 타카네에게 묻는다. 타카네는 받아든 케이크 상자를 냉장고 안에 집어넣으며 아직 자고 있어, 라며 입술을 잘근거린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신타로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악몽 꿨나보네." 

 "허어, 어떻게‥‥." 

 "나도 그래서 온 거니까." 

 "그 녀석도 질기네. 복수하겠다는 거야, 뭐야? 아~ 완전 쪼잔해! 나가 뒈져버리라지!" 

 "‥‥허이구, 분명 선배 자고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어도 되는 거냐고. 너‥. 멍청이냐?" 

 "윽! 누가 멍청이야?! ‥아~ 시끄러! 증말." 

  별 의미 없는 대화를 자연스럽게 늘어놓으며, 신타로의 말에 타카네는 눈을 날카롭게 뜨고 신타로를 바라보았다. 악몽이고 자시고, 사실은 성깔 긁으러 온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이 저의 머릿속을 한 번 휘젓고 스친다. 후우, 숨을 내뱉은 타카네는 손목에 걸려있던 검은색 머리끈으로 대충 머리를 묶고는 프라이팬을 꺼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었다. 아침 아직이지? 그렇게 묻자 역시나 익숙하게 어. 아직. 그리 말하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달걀 서너 개를 꺼낸 타카네는 식용유를 두르고 프라이팬 위에 달걀을 깨뜨린 후 바로 옆에 놓여 있던 후라이팬의 뚜껑을 들어 위에 덮어놓고 몸을 돌려 신타로를 바라보았다. 소파 앞에 기대어선 소년은 신경 쓰인다는 듯, 연신 침실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어제도 네가 달랬어?" 

  그런 신타로를 향해 무어라 이야기하려 입술을 달싹거렸을 때, 타카네는 신타로의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 몸을 들썩거렸다. 허, 뭐‥‥, 신타로의 물음에 타카네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쑥스러운 듯 눈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저의 답에 괜히 물었다는 표정을 지으며 완전 리얼충이네‥‥. 하고 중얼거리는 순간,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침실을 바라보았다. 어라, 신타로? 완전히 잠에서 덜 깬 듯 부스스한 모습으로 문턱을 짚은 하루카가 눈을 비비며 타카네와 신타로를 번갈아 보다, 언제나처럼 웃으며 좋은 아침이야, 라고 이야기한다. ‥‥역시 괜찮지 않을까.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나아지지 않을까. 

  나아질 것이다. 괜찮아질 것이다. 하루카의 웃음을 보며, 타카네는 그런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