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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리퀘스트

[탕님/쿠로마리] 애정의 되풀이









 불쌍한 나에게도 단 한 번, 누군가를 사랑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가 앉아있는 곳은 붉은 방 같았다. 흡사, 붉은 방. 물감 따위는 아니고, 갈기갈기 찢어 바닥에 고인 피를 손바닥으로 문질러 펴 바른 듯한 느낌이 가득하게 피로 잔뜩 무언가 그려진 그런 방.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무엇이 잘못되었던 걸까. 자신의 탓으로 그 모든 것을 돌려가며 생각해봐도 남는 것은 자책뿐이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이 처한 이 상황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분홍색의 두려움이 잔뜩 서린 눈물 걸린 둥그런 눈을 천천히 굴리기 시작한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내뱉은 말이 그의 귓가에 울려 퍼지자 그는 전혀 무미건조한 노란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그것이 무서워서. 소녀는 작게 몸을 움찔거렸다. 

  그런 마리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청년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다. 그러네, 당신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겠지. 당신이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듯이. 느긋이 눈을 휘어 접고 웃어 보이는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인다. 그녀는 천천히 제 팔을 꾹 잡고 상체를 숙인 채 고개를 숙였다. 모르겠어, 알고 싶지 않아‥‥. 작은 울림이 방 안의 공기를 휘저으며 울린다. 이런 거 싫어, 얼른 끝내버리고 싶어. 중얼중얼, 그가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피비린내가 올라오는 붉은 아스팔트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는 계속해서 중얼거린다. 그 모습을 우두커니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청년은 앉아있던 작은 철조 물에서 벌떡 일어나 떨어져 있던 검은색 권총을 주워들었다. 지금부터 들어 봐, 여왕. 당신은 이것으로부터 모든 해답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모든 것을 말하고, 당신은 모든 것을 듣고, 그저 나쁜 조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청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공간을 울린다. 듣고 싶지 않아, 몇 번이고 반복하지만, 그는 들리지 않는 척을 한다. 낄낄, 작게 웃음을 흘리며 눈을 흘기던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입을 열었다. 그에 따라 소녀의 귀에 날카롭게 갈린 언어의 파편이 강하게 꽂혔다. 

  나는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심장 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댄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살아있는 몸이라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것이지. 사랑에 빠진다면 가슴이 뛴다고 했던가, 제 앞에서 두려움에 절어 차마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면, 그래. 정말로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런 생각이 들고 그 모든 생각은 머릿속에서 하나로 뭉쳐져 식도를 타고 아래로 데굴데굴 떨어져 쓰레기통으로 던져진 종이뭉치 마냥 퍽, 강한 소리를 내며 심장 안에 담긴다. 몸서리를 쳐대고 싶을 정도로 차가운 피에 스르르 젖어들어 가는 그것은 별안간 갈기갈기 찢겨 온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으면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쿠로하의 말에 마리는 고개를 든다. 간신히 쿠로하와 눈을 맞추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여느 때보다 부드러운 시선이 저를 향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빗물처럼 천천히 몸을 장악해나가는 그것들이 기분 나빠 마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도망치고 싶어. 당장에라도 힘차게 발을 디뎌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몸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생각일 뿐이지, 도망칠 수 없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이 아닌가! 

  절망스러워. 긴 적막을 깨고 은연중에 내뱉은 말이었다. 쿠로하는 가늘게 눈을 뜬다. 별안간 시야에 들어오는 소녀의 눈빛과 귀를 파고드는 목소리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체념한 이의 눈빛이 아닙니다, 여왕. 두려움이 가득했던 눈에 서서히 날이 서는 것이 보인다. 마치 자신을 죽여버릴 듯이, 찢어버릴 듯이. 허나 들리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두려움에 떠는 새끼짐승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 당신은 체념하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한다. 청년은 그녀를 망연히 바라보다 푸,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한발 한발 걸음을 디뎠다. 한만 하게 팔을 뻗어 크고 하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싼 뒤 여유 있게 그것을 들어 올린다. 

 "나를 봐." 

  뜸지근한 눈빛에 마리는 얇은 아랫입술을 눌러 씹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내 사랑을 거부할 수 없어.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하는 것이 보통 온화한 모습이 아니어서 소녀는 제 몸을 타고 흐르는 오한을 느꼈다. 발끝부터 오르기 시작하던 것이 금세 머리 위로 달려들어 눈물이 됐다. 이젠 싫어‥‥. 중중 거리는 목소리가 반쯤 메어 있었다. 제발, 그만둬 줘…. 좋아하지 않아, 싫어, 무서워. 내뱉을 수 없는 말이 녹아들듯 식도를 타고 심장에 꽂혔다. 




  소녀는 초록색 소매에 남자의 팔로 보이는 것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세토‥‥. 울분에 젖어 속삭이는 이름이 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을 찢어발겨도 부족한 새끼. 분에 찬 새끼. 쿠로하는 멀거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속이 뒤틀리다 못해 당장 저것을 가죽과 뼈와 신경으로 나누어 늘어놓아도 가슴속에 쌓인 것이 풀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쿠로하는 숨을 삼켰다, 흉부를 짓누르고 있는 감정 덩어리를 손으로 잡아 바닥에 던져버린 뒤, 그녀가 들고 있던 팔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눈을 휘어 웃어 보였다. 반복, 그와 그녀의 애정에는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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