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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여유를 가지고 걷는 사람 키사라기 모모는 재빠르게 발걸음을 옮기며 현관으로 향했다. 얼마 전에 팬이 준 선물이라고 했던가. 검은색 리본이 달린 하얀색 플랫슈즈를 고이 숨겨놓았던 하늘색 박스 안에서 꺼내어 내려놓고 그 안에 들어있던 꾸깃꾸깃 뭉쳐져 있는 종이를 빼내어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하얀색 자켓 주머니 안에 들어있던 하늘색 이어폰을 꺼내어 제 귀에 꽂아 넣고 줄 중간에서 달랑달랑 춤을 추며 달려있는 것을 엄지로 꾹 누른다. 달칵달칵,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동에 괜스레 기분이 흔들흔들, 잔 안에서 춤을 추는 음료수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녀는 신 안으로 그 작은 발을 쏘옥 집어넣고 두어 번 짤막하게 발을 굴렀다. 신발 안에 꼭 제 발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녀는 한껏 들뜬 목소리를 내며 현관문을 열었다. 순식간에 열린..
[하루신] 아주 해로운 일 아, 저 사실 지금 엄청 졸리거든요. 신타로는 꾸벅꾸벅 고개를 숙였다 쳐들기를 반복하며 중얼거린다. 도대체 어젯밤에는 뭘 했어? 하루카의 물음에 그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빼어내 휘휘 저어 손사래를 쳤다. 선배가 알면 안 되는 짓을 했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신타로. 모르는 게 좋아요. 정신건강에 아주 해로운 일을 했거든요. 정말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하루카는 웃는다. 아주 작게, 큰 손으로 작은 주먹을 쥐어 그 측면으로 지그시 입술을 누르며 웃음소리가 교실 안을 맴돌 정도의 크기가 될 수 없도록. 그런 하루카의 모습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면서, 신타로는 연신 흔들어대던 손을 거두어 책상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은 채 고개를 까딱거리며 샐쭉댄다. 모른다면서 웃는 건 좀 수상한데. 치켜세워..
[하루신세토] 평생 모를 거예요. 내 마음. [BGM] 블락비 - Toy 컵에 물을 쏟아 붓듯 신타로는 세토의 품속으로 제 몸을 욱여넣은 채로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손으로 문질러 닦아 낸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얇은 머리카락에서는 간지러운 꽃냄새가 마구 풍겼고, 약간의 물기가 남아있는 듯 했다. 소년은 손을 들어 청년의 둥글게 휜 등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아지트 내에 남은 저와 그, 단 둘. 신타로는 몇 가지 조건이 성립되는 상황이 오면 세토의 품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마치 한 마리의 동물처럼 새근새근 숨을 내뱉으며 잠을 청하고는 했다. 첫째, 그의 애인인 하루카가 자리에 없을 것. 둘째, 세토와 신타로 단 둘일 것. 이것도 일종의 분리불안장애라고 할 수 있을까, 언젠가 인터넷에 올렸던 지식포털사이트에 달린 답변 중 딱 한 번 이해할 수 있었던 ..
[쿠로신/카게전력60분] 보라색 안개꽃=깨끗한 마음 [BGM] IA X ONE - CITRUS 난 좀 외로움을 잘 타는 놈이야. 신타로는 손에 들려 있던 보라색 안개꽃의 이파리를 하나씩 뜯어 바닥에 던져 놓는다. 저 멀리,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저를 바라보고 있던 청년은 소년의 말에 별안간 히죽, 입 꼬리를 올려 웃으며 묻는다. 그래서? 그래서, 라니. 그냥 그런 거야. 나는 외로움을 잘 탄다는 거. 사실 말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을 터인데. 너. 쿠로하의 입 밖으로 무언가가 흘러나오기 전에 신타로는 그가 아무 말도 할 수 없도록, 오직 자신의 말만 들을 수 있도록. 숨을 한 번 들이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별로 다른 녀석들을 가까이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친구라고 해도, 결국 걔들이 채워줄 수 있는 외로움에는 한계가 ..
[신타카] 기억중추 [BGM] 랄라스윗 - 파란달이 뜨는 날에 @Spacepapilon 타카네는 붉은색 소파 위에 기대듯이 앉아 누가 무얼 했다느니, 어느 누가 어딜 갔었다느니, 그런 것들을 떠들며 시답잖은 농담 질이나 하고 있는 재미없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도대체 저런 건 왜 보고 있는 건지, 신타로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려 그녀가 있는 방 안을 한 번 싹 훑었다. 저 멀리 방 안에 켜두었을 등으로부터 주황색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마는 그것이 암전된 거실을 밝혀주기에는 역부족인 듯 했다. …하여간, 어둠의 자식도 아니고. 짧게, 타카네가 듣지 못할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리며 청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본다. 그는 마지막으로 비누거품이 묻어난, 모서리에 분홍색 장미가 그려진 약간 각이 진 네모..
[코코노세 하루카] 마지막으로. 쿠로하는 참고 있던 숨을 뱉어내며 무릎을 꿇었다. 이제껏 느껴보지 못했던 싸늘한 공기가 발끝으로 시작하여 차오르고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무너지고 있는 제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무리의 시선에는 제가 느끼고 있는 공기만큼의 동정도, 무엇도 없는 싸늘함이 담겨 있었다. 코코노세 하루카, 아니. 이름 모를 그 불쌍한 뱀 새끼는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을 깨닫는다. 여태껏 이끌었던 그 모든 계획은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나. 영혼을 갉아먹으며 더한 일을 일으키게 하고, 마지막까지 그토록 바랐던 "살아가고 싶어." 따위의 소원은 이루어주지도 않고 간단히 외면함은 물론이고 이제는 '너는 끝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운명이라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것이지, 총알이 떨어진 검은색 권총을 땅에 내팽..
[하루신] 지는 꽃. 저기, 신타로. 나는 있잖아. 신타로의 얼굴밖에 본 적이 없어. 그렇게 말하고 있는 하루카의 얼굴은 흔들림없는 강처럼 한없이 잔잔했다. 조금, 방금 저가 무슨 말을 들었나. 제 귀를 의심했지만 이상할 게 없었다. 하루카가 헛소리를 하는 거야, 한두 번인 일도 아니고. 소년은 들고 있던 잡지에서 눈을 떼지 않고 천천히 종이를 넘긴다. 사락사락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이 병실을 가득하게 울린다. 그래요, 선배. 그러시겠죠. 알고 있어요. 눈을 끔뻑이며 내뱉은 말에는 일말의 동정조차 없었다. 감정도 없고. 구깃구깃한 병원복을 차려입은 청년은 여전히 웃는 얼굴을 유지한 채 눈을 굴리며 으음, 하고 작게 소리를 낸다. 링겔이 잔뜩 꽂힌 얇은 팔모가지를 들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다 빙그레 웃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