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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카게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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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책상 위, 깨진 꽃병 사이로 얼굴을 내민 말라 비틀어진 꽃잎에서는 막 뱉어낸 핏물의 냄새가 났다. 신타로는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 안으로 새어들어오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이, 그저 자신이 내뱉은 숨만이 붕 얼굴 위로 떠올랐다가 따뜻한 온기에 녹아내려 얼굴로 쏟아진다. 이질적인 고요함, 다소 불편한 고요를 깨서는 안 될 것만 같아서 그는 그저 살짝 몸을 뒤척거리지도 못하고 그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고 있다. 정말 싫다. 불현듯 머릿속에 처박힌 생각이 벽에 쓸기 시작한 곰팡이처럼 마냥 퍼져 나간다. 집에 가고 싶다.
[세토신] 39 [BGM] 하츠네 미쿠 - 39 세토는 제 앞으로 내밀어진 분홍색 꽃다발과 신타로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휘둥그레 떠진 눈은 감길 줄을 모르지. 그 표정이 어찌나 웃긴지, 애써 표정을 굳히고 있던 신타로의 입 꼬리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고 그것을 가리기 위하여 축 늘어져 있던 손은 절로 입가로 향했다. 여전히 눈을 둥그렇게 뜬 세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인생은 주위를 중심으로 두고 돌아간다고 했던가, 이 정도나 되면 앵간 눈치 까고 꽃다발을 받으며 기억하고 있어줄 줄은 몰랐어요! 같은 반응이 나와야 할 텐데. 어지간히 제 인생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렷다. 어휴, 그래. 나 아니면 누가 챙겨주겠냐, 어? 튀어나오는 한숨과 웃음, 초록색 리본이 묶인 흰색 꽃다발을 ..
[신아야] 오만의 대가 한 여름, 도저히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연신 몸을 흔들어대던 검은 아스팔트 위에서 나는 몸을 휘청대면서도 꿋꿋하게 걷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로부터 반쯤 흘러내린 얇은 갈색의 가죽 끈을 잡고 올리며 쉬지 않고 계속해서 걷고 있었다. 항상 걷던 것을 멈추고 잠시 머무르던 붉은색 자판기 앞에서도, 언제나 붉은 빛을 깜빡거리던 신호등 앞에서도, 덩그러니 놓인 대형스피커 안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듣기 위해서 아주 잠깐 걸음을 멈추던 붉은색 패널이 세워진 식료품 점 앞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생활도 며칠 째더라. 방금 막 잠에서 깬 것처럼 멍한 정신을 일으켜 세우고 가까스로 멀쩡한 생각 하나를 던져놓는다. 언젠가부터 흐릿한 시야 안으로 들어오는 게 없었다. 이전에는 적어도 여러 가지가 뵈었던 것 같은데. 예컨..
[세토신] 박아넣다. [BGM] 아라키 - ECHO "제 추리는 틀리지 않았어요." 발끝부터 서서히 몰려드는 싸늘함이 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있다는 듯이 번뜩이는 호박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자신을 향해 있었다. 좋게 말하면 희열, 나쁘게 말하면 불안함. 머리 위로 눌어붙은 감정들은 길게 늘어져 연장선을 그리며 자신의 정수리부터 천천히 적셔가고 있었다. 키사라기 신타로는 몸을 떨었다, 제 앞에 있는 이가 눈치 챌 수 없도록 아주 미미하게 몸을 떨어대며 입술을 짓씹었다.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연이어 몰아치는 질문은 별안간 그의 머릿속에서 태풍따위를 연상케 했다. 초조함을 느끼고 있다, 감정이라는 것에서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던 신타로로서는 속을 휘젓는 이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의심을 받고 있다, 그..
[하루신] 감기 조심합시다 죽겠어요 “완전히 골골대고 있잖아요.” 이마 위로 내려앉은 손이 한겨울 눈송이처럼 차디찼다. 제가 꾸준히 내뱉고 있는 숨은 뜨겁고, 온몸에서는 뭉게뭉게 열이 올랐다. 툭 튀어나온 감이 있는 말에는 다듬어지지 못한 염려가 묻어있었다. 하루카는 덮고 있던 이불을 꼭 잡은 채 가슴 위로 끌어당긴다. 아하하, 완전히 맛이 간 목에서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군데군데 갈라지고 찢어진 것을 어떻게 할 수도 없이 그저 웃어 보인 하루카는 천천히 눈을 끔뻑거리며 이마로부터 거둬지는 손의 밑바닥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학교 안 나왔다는 이야기에 엄청 놀랐다고요. 알고는 있어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은 기분. 단지 기분 탓이겠지마는, 새빨간 입술을 앙 다문 채, 평소보다 빛이 덜한 둥그런 ..
[쿠로신] 딜. 어쩌면 너도 나도, 다른 녀석들도 모두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침대 위에 엎어져 있던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꽤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쿠로하는 막 걸친 셔츠의 단추를 채우는 것도 잊어버린 채로 고개를 돌려 신타로를 바라보았다. 이불로 둘둘 몸을 말고서 얼굴을 베개에 파묻은 채로 살짝 붙잡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모습이 어째서인가, 눈에 강하게 박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런 것은 물을 가치도 없었다. 몸을 섞는 행위에 연장선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걸로 안심따위는 할 수 없다. 그래, 저 녀석에게는 아직 해결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있는 셈이니까. 그래서? 그렇게 묻는 쿠로하의 목소리는 심드렁했다. 관심 없다는 느낌. 울컥하고 차오르는 것이 있을만..
[하루타카] 넌 집에 안 가고 싶어? 날이 참 맑았다. 점심을 먹은 후라 그런가, 잠은 점점 오기 시작하고. 아니. 사실 점점 오기 시작했다는 말보다 반쯤 잠에 절어있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리라. 귀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헤드폰에서는 여전히 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쿵짝쿵짝, 이런 정신 사나운 노래를 듣고 있으면서도 잠에 반쯤 절어있을 수 있다는 건 썩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까? 어디 잠을 가장 잘 잘 수 있는 사람에게 상 주는 대회 같은 게 있다면, 그런 직업이 있다면 평생 놀고 먹으며 돈까지 벌 수 있지 않을까 쓸데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그런 생각이 머리를 한 번 휘젓고 바람에 실려 창 밖으로 사라져간다. 그런 자신과는 다르게 또 다른 소년, 코코노세 하루카는 제 옆에 있는 책상에 앉아 끊임없는 창작을 통해 보람찬 하루를 보내고 있..
[쿠로신] 착각이 아닙니다 깡, 신타로가 팔을 한 번 휘적거림과 함께 그가 들고 있던 캔은 곧장 날아가 하얀색 벽과 부딪힌 후 벽 위에 짙은 커피자국을 두 방울 정도 남긴 뒤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새끼 또 왜 승질이람. 하얀색 가운을 입고 한쪽 팔에 차트를 낀 채 우두커니 신타로를 바라보고 있던 쿠로하는 짧게 혀를 차며 들고 있던 커피를 마저 마신 뒤 아니나 다를까 옆에 있던 푸른색 쓰레기통 안으로 그것을 던져 넣었다. 깡, 깡! 아무리 한적한 시간이라고 한들 의사라는 것들이 아무렇게나 쓰레기통에 다 마신 커피캔을 대충 쳐박는 것도 모자라 욕짓거리나 뱉고 있으니 이건 뭐, 의사로서의 위엄따위는 개한테나 던져주고 있다. 타카네가 자리에 있었다면 그리 말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분명 말 조심 정도야 했겠지마는, 알 바인가. ..